6월21일 공은경 베로니카 사랑구역장님 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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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미사 강론
찬미 예수님!
사랑 구역의 구역장을 맡고 있는 공은경 베로니카입니다.
평일 미사도 아니고 주일미사 강론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걱정이 되어서 며칠 전 가톨릭 신자인 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좀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친구도 무척 놀라더군요. 제 맘을 알아주는 게 저는 기뻤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어디 나가서 사람 죽이고 오라는 거 아니면 그냥 해봐라” ^^ 저도 웃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제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게 되더군요.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과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구역장을 맡은 게 작년 9월부터이니까 아직 1년이 채 못된 새내기 구역장인 셈입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랑 구역은 구역 중에서 제일 작아서 구역원이 많은 곳과 비교하면 인원이 절반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가대를 20년 넘게 했는데 구역장이 다른 단체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단체장들은 단원을 언제나 볼 수 있고 전화 연락도 다 가능하고 회합이나 연습시간에 얼굴을 볼 수 있는데 구역은 좀 달랐습니다. 반 정도는 얼굴 없는 분들이시라고나 할까요.. 구역 명부에는 있지만 안 나오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웬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이다 보니 실수도 있습니다. 진건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수원이나 평내등) 이사를 가고

교적을 옮기지 않으신 세대를 모아 얼마 전에 99구역으로 옮겼는데요.

그때 우리 구역에 살고는 있지만 쉬고 있는 두 세대를 99구역으로 같이 옮겼는데, 후에 생각해 보니 괜한 일을 했다 싶었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물론 본인들의 의향도 듣고 언제라도 다시 나오시면 구역으로 환원된다는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반이나 되는 분들을 다 옮겨야 할 판이고, 교회에 언제 다시 나올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인데 제 판단으로 다시 나오지 않을 분이라 여기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또 쉬는 교우분과 전화로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문 앞에서 얼굴이라도 뵈려고 달력을 들고 간 적이 있는데 필요 없다고 거절하셔서 무척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기도 했는데 밖에다 놓고 가겠다는 것조차 거절하셔서 달력을 들고 혼자 돌아오며 속상해서 울고 싶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안 나오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계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도 있을 수 있고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가 자식 문제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서 안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을 찾기도 하지만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을 떠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힘든데도 나를 알아주시지 않는 하느님, 그렇게 미사를 열심히 나갔는데 하느님은 왜 내 괴로움을 모른체 하시는 건지,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의 일상이나 마음에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거라는 단절감과 상실감으로 교회를 떠나곤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힘들고 어려운 적이 없으신 분 혹시 계십니까?.......
저도 주님에게 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제게 주셨는지 여러 번 반문하곤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집을 몽땅 날려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전세를 살고있었는데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잔뜩 받고 잠적을 해서 경매에 넘어간 것입니다. 당시에 저는 다른 지역에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집 주소를 옮겨 놓은 상태여서 확정일자의 보호를 못 받게 되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서 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충격이 크니까 정말 아무 감각이 없더군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차에 제 몸이 부딪쳐도 아픔이라는 감각조차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길 건너 맞은편에 큰 성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길을 건너 휘청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성당 문을 밀었는데 문이 잠겼는지 열리지 않는 겁니다. 그대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저를 외면하신 것 같은 절망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진건으로 오게 된 이유도 그 일이 있고 나서였습니다.

명동에서 교적을 찾아와 이곳 진건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리는데 쉴새 없이 눈물이 나 펑펑 울었습니다. 마치 멀고 먼 사막을 헤매다 고향의 품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의 삶에는 ’인생총량의 법칙‘이라는게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길엔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슬픔, 아픔, 즐거움, 고난, 걱정의 양을 가지고 있어서 그 총량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고 난 자기 몫의 희비애락을 쓴다는 것이지요. 결국 죽을 때가 되면 그 무게가 거의 같다는 것이고 그래서 누굴 특별히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불행에
절망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문학과 물리학 박사이며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대학교수로 승승장구하던 “필립시먼스”라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근육이 마비되어 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밝고, 거룩하고. 건강하고, 화려한 것 들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찮은 것들, 병들고, 지루하고 낡은 것, 어둠에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에게 이 말은 너무 어려운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어둠 속에서 주님과 더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35년 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두 아들의 엄마로 늘 종종거리며 시간에 매여 살았습니다.

퇴직하고 2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시간에 늦어 가슴을 졸이며 괴로워하다가 깨어나곤 합니다. 지난 제 삶이 아주 길고 긴 사막을 지나온 느낌이지만 무거운 십자가로 여겼던 가족이 지금은 제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으니 참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현실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으니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지병들과 잘 타협하면서 살아야 하고 한 달 전부터 재발한 디스크가 매우 불편하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문제투성이이고 불완전한 삶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인내심과 관대함을 갖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으로 알게 되고 내적인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의 시기라는 것도 주님이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는 대신 우리 동네에 있는 사능천 변을 자주 걷는데 수풀 사이를 비집고 흘러가는 맑은 물을 볼 때마다, 멋진 하늘과, 하얀왜가리의 우아한 몸짓을 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옵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지만 저는 매번 이 기적들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완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바라고 원합니다. 성공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작은 참새 한 마리조차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찬미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기쁨으로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라서 저의 두 아들에게도 보냈던 타고르의 ‘기도,라는 시가 있는데 이 자리에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기도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 달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할 친구를 보내달라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 달라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열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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