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47 내 삶의 중심

찬미 예수님.

하느님의 은총을 더 쉽게,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하느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틀에 맞춰서 하느님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객관적인 내용,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계시하신) 내용 그대로를 알아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들이 모여서 하느님에 대해서 고심하고 합의해서 ‘우리의 하느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고 정하자!’라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부르시고 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 계시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지의 차원에서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올바로 알아들으려는 노력은 사실 우리가 이미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분들이 각 교구나 수도회에서 주관하는 성서 모임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계시죠. 또 여러 신학교를 살펴보면,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분도 학생으로 많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싶어서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 ‘공부’를 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점점 더 올바로 알아가고 있죠.

하지만 이렇게 인지의 차원에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하느님이시라면 ‘참된’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직 우리 삶에 ‘살아계신’ 하느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미라를 알고 계시죠? 주로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이의 부활을 대비해 그 시신을 썩지 않도록 처리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후에 미라의 상태로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한 거죠. 그래서 평소에 미라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어느 날 한 박물관에서 ‘미라 특별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연히 가보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겠죠. 그래서 어느 주일 시간을 내 박물관에 갑니다. 그곳에 갔더니 실제 미라가 여러 구 전시돼 있고 각각의 미라들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도 적혀 있습니다. 이 미라는 어느 시대, 어디에 살았던 누구이고 그 신분은 어떠했으며 또 어떠한 처리방식으로 미라가 됐다는 설명들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참 재밌다. 오길 진짜 잘 했다’라는 마음이 들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라들을 관람하다 보니 박물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됩니다. 아직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관심이 많았던 미라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섭니다. 그리고 월요일이 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자,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간 이 사람의 삶에 전날 봤던 미라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미라를 실제로 보게 된 경험이 그 사람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될까요? 실제로 미라를 봤다는 흥미로움, 뿌듯함은 며칠 더 지속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지적인 호기심을 채운 것 말고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미라의 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 감을 잡으시는 분이 계시죠? 맞습니다. 우리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더 ‘참되게’ 알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전례 말씀과 강론을 듣고 하느님을 만나죠. 그런데 이러한 공부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아니면 ‘아, 하느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아는 인지의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속성이 어떻고 성경이 쓰인 역사적 배경이 어떤지를 알게 되더라도 그러한 지식이 그 사람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요? 주일 하루는 성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만나지만, 한 주간의 삶 동안 하느님과는 별개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면요? 그 하느님은 아직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 들어오지 못하신 하느님, 내 삶 안에 살아계시지 않는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시나요? 신앙이 있으십니까? 네, 당연히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어려움은 우리 안에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충분하냐 부족하냐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신앙이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만큼이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것은 신앙이 내 삶에서 어느 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참되게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결국, 정서의 차원이고 사랑의 영역입니다. 사랑을 여러 의미로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한 모습은 어떤 대상,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간에 그 대상에 대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는 모습입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데 힘이 남고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정말 좋아서 어떻게 해서든 그 대상을 향해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쏟는 모습인 것입니다.

흔한 예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죠. 시간이 남고 돈이 남아서 상대방을 위해 선물을 사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느라 바쁘고 또 경제적으로도 어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만나러 가고 또 내게 필요한 것을 아끼면서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좋아서,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죠. 해야 하는 의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지의 측면이 연관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려면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온전히 다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면이 있는지를 알아가면서 그 사람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참되게 알아가는 인지의 차원이 필요하죠. 하지만 미라의 예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실제로 그 대상을 향해서 나의 힘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무엇에서 위로를 얻으십니까? 기쁘고 즐거울 때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여러 떠오르는 생각 중에 하느님도 물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께서 몇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가요? 내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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