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54 웃음꽃

 


찬미 예수님.

얼마 전 어느 본당에 미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 신학교에 와서 한동안은 한 달에 한 번, 동기신부가 보좌로 있는 본당에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유학 생활 내내 신자분들과 떨어져 지냈던 아쉬움에, 비록 신학교에 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일미사 강론 준비도 하고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이 저의 사제 생활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주일 밤 9시 미사였는데, 처음 얼마간은 그렇게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 드리는 것이 참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제대에 서서 신자분들을 바라보는 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내면서는 본당에서의 미사도 좋지만 그보다 신학교 소임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동창 신부에게 미안하지만 저 대신 다른 신부를 찾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고서 미사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이후로 본당에 미사 드리러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래도 어린이 미사를 한 번 드리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던 저인지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하느님 말씀 잘 들었어요~ 내 마음 깊이깊이 새길테야요~” 어린이 미사곡을 부르면서 미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래서 동기신부들 모임 때 어린이 미사를 한 번 드려보고 싶다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기억했던 한 동창이 중고등부 주일학교 행사로 자리를 비우게 된 어느 주일 어린이 미사를 제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어린이 미사라면 마지막으로 드려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 일이었던지라 저는 흔쾌히 응답했지요.

미사 드릴 본당으로 가는 길부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사 전에 고해소에서 아이들 고해성사를 주면서는 순수한 아이들의 고해 내용에 혼자 흐뭇해했지요. 미사가 시작되어 제의실에서 복사 아이들과 함께 나오려는데, 네 명이나 되는 복사 아이들이 자기 자리를 못 찾아 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 아이들이니까 이러는 게 당연하지.’ 강론 때 이런 저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면서는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미처 준비를 못해왔다는 후회도 했지만, 그래도 서로 대답하겠다고 손을 드는 유치부 아이들부터 꼭 자기를 시켜달라는 눈빛으로 두 눈에 힘을 주고 저를 바라보는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의 모습을 얼마나 흐뭇하게 바라보실까!’ 미사 내내 제 얼굴에 웃음꽃이 다시 활짝 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미사 때 밝은 얼굴로 웃음꽃을 피우는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요. 생각해보면,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도 미사 드리는 제 표정이 꽤나 밝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본당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참 많이 반갑고, 대견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뿐만 아니라 교정을 오가며 신학생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제 나름으로는 반가운 얼굴, 웃는 표정으로 다정하게 신학생들을 바라보며 인사했던 처음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 얼굴에서 웃음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하게 되는 신학교 양성소임에 적응하는 것이 못내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주어지는 여러 일들을 해나가는 것에 육체적으로 지쳐가기도 했고, 또 사제 양성을 위한 보다 이상적인 환경이 아닌 구조적인 한계에서 오는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으로도 많이 지쳐갔던 것 같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드리던 것을 그만둔 이유도 사실은 그런 데에 있었지요. 비록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아침에 신학교 미사를 드리고 나서 다시 저녁 늦은 시간에 오며 가며 3시간을 들이는 것이 버겁기도 했고, 우리 교구의 사제 양성 현실이 많이 부족한데 이렇게 자꾸 신학교 밖의 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자꾸 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학생들로부터 ‘신부님, 요새 표정이 많이 어두우세요’, ‘신부님, 요즘도 많이 피곤하세요?’하는 이야기들을 점점 자주 듣게 되는 것이 신학교에서 지내던 그간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좋은 목자로 성장하는 데에 할 수 있는 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제 표정은 왜 자꾸만 어두워지고 또 계속해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느껴왔을까요?

처음에 신학교 양성소임을 맡게 되면서 가졌던 생각과 마음은 그대로지만,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싶습니다. 제가 살아야 할 방향에 대해서 추상적으로만 생각했지, 그런 방향성을 제가 ‘지금 여기’에서 처해 있는 상황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지에 대해 찾는 것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신학교 사제양성 현실의 부족함과 한계에 대해 제 나름으로 느끼는 안타까움과 불만은 점점 늘어갔으니, 제 표정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죠.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지 않고 주어지는 현실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했으니 몸과 마음이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머리로만 행복하다고 생각했지 실제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 경우도 그렇지만, 우리 신앙인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한 번, 하느님 따라 너중심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자동으로 너중심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 안에서 어떤 것이 예수님을 닮고 하느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인지를 계속해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세 나중심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체적인 길, 늘 새로운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도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 기도의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해 말씀드렸죠. 인격적인 관계의 기도, 청원의 기도 그리고 원망과 하소연의 기도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간다면 우리 기도의 모습도 또 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매일의 삶을 두고 구체적으로 드리는 청원의 기도, 하소연의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생생한 관계를 맺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기도의 삶은 저 멀리에 떠있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선택하고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세요. 생각으로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그럴 때 우리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날 겁니다. 바로, 기도의 삶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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