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57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찬미 예수님.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어떻게 ‘은총으로 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성모님께서도 기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아 가셨고 그러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가셨죠. 결국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과 깨달음의 과정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또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일까요? 그럴 때 우리 삶의 의미가 찾아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품을 받고 아직 새사제로 출신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 출신 본당 옆 다른 본당의 주임 신부님께서 중요한 일로 한 달 동안 본당을 비우셔야 할 일이 생겼지요. 그래서 그 신부님께서 제 출신 본당 주임신부님께 한 달 동안의 미사 부탁을 하셨고, 마침 새사제까지 있던 터라 주임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그 부탁에 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주임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미사 배정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제 출신 본당과 옆 본당의 미사 시간을 다 놓고서 셋이서 돌아가며 하나씩 맡아 나갔죠. 그런데 그러다 보니 미사 대수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셋 중의 둘은 미사를 한 대씩 더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 셋 중에 누가 미사를 한 대씩 더 드리게 되었을까요? 아무래도 주임 신부님이 제일 어른이시니까, 보좌 신부님과 새사제인 제가 한 대씩을 더 맡아서 하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주임 신부님께서는 공평하게 사다리를 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사다리 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독자 여러분들도 아시나요? 흰 종이에 여러 세로줄을 긋고 그 사이 사이에 가로줄을 그어 전체적으로 사다리 모양의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그리고 각각의 세로줄 밑에는 ‘1등’ ‘2등’ ‘3등’을 적어 놓는데, 어떤 세로줄을 택해야 마지막에 1등이라고 쓰인 세로줄에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로줄 중 하나를 선택해서 따라 내려가다가 가로줄을 만나게 되면 그 가로줄을 따라 이동하고, 그에 이어지는 세로줄을 따라 내려가다가 또 가로줄을 만나면 그를 따라 이동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가로줄이 얼마만큼 그어져 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지 않고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사다리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두 분 신부님과 제가 출발점을 하나씩 선택하고는 그 줄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가 1등을 했는지 또 누가 꼴찌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순위가 정해졌지요. 그리고 저는 당연히 2등과 3등을 한 신부가 미사를 한 대씩 더 맡아서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임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신부다. 그리고 신부는 미사를 드리는 사람이고 그렇게 미사 드리고 싶어서 신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한 대라도 더 미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다. 그러니 꼴찌가 아니라 1등과 2등을 한 신부가 미사를 더 맡아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어떠세요? 그 신부님 말씀에 수긍하시나요? 이제 막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저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안 하면 더 좋을 것을 꼴찌가 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1등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신부보다 미사 드릴 기회가 더 많아서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제로 사는 참 모습이고 참 기쁨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체험이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그 말씀은 끊임없이 자신이 사제로 사는 의미, 그 이유를 기억하고 그에 따라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해가려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다 싶습니다.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성찰과 동의를 계속 해나가는 모습에서 비롯된 말씀인 것입니다.

사제성소에 응답하고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가꾸어 사제가 되는 이유는 미사를 봉헌하고 또 여러 성사와 성무를 수행하면서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사제직에 응답하는 것이죠. 물론 현실의 상황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당에 홀로 있으면서 모든 미사를 다 집전해야 하고, 계속해서 본당의 수많은 단체들을 돌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 끊임없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삶이 마냥 편하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 외적인 환경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의 내적인 약함 때문이든, 그래서 때론 지치기도 하고 어려움과 한계들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다양하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사 드리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최대한 안 하려고 하고 또 고해성사나 다른 면담의 기회들을 귀찮아하고 피한다면, 사제로 사는 의미가 있을까요? 사제로서 성무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들 안에서 기쁨을 얻으려고만 한다면, 사제로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할까요?

신학교에서 지내는 요즈음에 제 모습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사제 양성에 도움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있다는 양성자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에 대해 동의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기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마음도 무거워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서 한 번 깨달았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는 현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계속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자리, 그리고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의 의미를 더 깊이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기쁨을 얻게 되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가만히 되뇌어 보세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비추어줄 것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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