슂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59 삶의 지혜

 



찬미 예수님.

끊임없이 지금-여기에서 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고 깨달아 가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기도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떠세요? 이런 기쁨을 쉽게 얻고 계신가요? 지금-여기에서의 삶의 의미와 또 내가 해나가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잘 찾고 계신가요? 그래서 정말 복음의 가치를 따라 신앙인으로서 기쁘게 살아가고 계신가요?

사실 우리의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지요. 기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제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너 중심! 너 중심!’ 하고 외치며 지내지만, 어느 틈에 돌아보면 다시금 나 중심으로 지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죠. 하느님을 만나는 밀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서도, 정작 저는 따로 시간을 내어 성체 앞에 앉지 못하고 그냥 잠들어 버리는 날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또 어떤가요? 늘 기쁘고 감사한 일들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자꾸만 이어집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아서도 그렇고, 가족 구성원에게 계속 안 좋은 일이 생겨서 힘들기도 합니다. 몸 한 구석이 안 좋아 병원에 가보면 자꾸만 이 검사 저 검사 더 해보라고 해서 불안하기도 하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음은 마음대로 무겁고, 기도를 하려 해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무엇 하나 붙잡을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욥 7,1) 통탄하던 욥의 말이 마음에 그대로 들어와 박힙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요?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고통의 신비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가 하느님을 더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잘 이루어지고 두루두루 신상에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큰 걱정 없이 평온하게 지내죠. 하지만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찾고 매달리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정말 그런 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잘 살면 복을 내려주시지만, 우리가 당신을 잊고서 제 멋대로 살면 그런 우리를 일깨워 주시려고 일부러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모습만 보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약 성경의 예수님, 곧 ‘모든 계시의 충만이신 그리스도’(「계시헌장」 2항)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일깨우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위해 대신 고통을 짊어지시는 분이십니다. 일부러 우리에게 고통을 주거나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필립 2,8 참조) 하느님! 바로 성경을 통해 교회가 가르쳐 왔고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바로 우리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우리가 있을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맡겨주셨죠. 주님은 영이시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2코린 3,17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유 의지 자체는 막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의지로 그 열매를 먹게 되고 그럼으로써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죄의 내용이죠.

다들 잘 알고 계시듯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인간 존재의 근원과 죄의 기원 등에 관한 성찰을 설화 형식을 빌려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죽지 않을 수 있었을지, 또 인간 생명이 영원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 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창조 설화와 원죄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신 인간의 본성이 상처를 입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욕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 차원에서 자꾸만 나중심으로 움직이려는 원리는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심리학적 고찰에서 보면 당연한 경향성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설화이기는 하지만, 아담과 하와도 우리와 똑같은 몸과 마음 차원의 원리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먹을 것을 필요로 했고 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죠. 다만 원죄 이전의 그들이 달랐던 점은, 몸과 마음 차원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먼저 따랐다는 점입니다. 나 중심이라는 하위의 경향과 너 중심이라는 상위의 경향 사이의 질서가 확실했는데 이 둘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 것, 이것이 바로 원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너중심의 영의 차원의 원리보다는 나중심의 몸/마음 차원의 원리를 먼저 따르고 싶어 하는 것이 원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인 것이죠.

결국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하느님께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인 너 중심이 아니라, 나만을 위하고 내 것만을 챙기려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네? 실상의 많은 고통들은 내 탓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주어지기도 한다고요? 맞습니다. 내 탓이 없음에도 부당하게 주어지는 고통도 많습니다. 바로 ‘죄의 연대성’입니다. 죄가 죄를 낳고 그 죄가 다시 죄를 낳는 모습이지요. 나 혼자만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욕심이 맞물려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내는 구조인 것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약함과 한계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재물과 영예를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내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지혜입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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