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긴장관계
내 안의 갈등 겸허히 인정하고 지혜 청해야
‘현실과 이상’ 긴장관계는 당연
성숙한 방법으로 변화시켜야
이번 주부터는 심리 차원에서 조금 더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우리의 파스카 여정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들이죠.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파스카 여정은 근본적으로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몸 차원과 정신/마음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자기지향성에서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인 타자지향성으로 파스카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번이 나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도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고민하는 이 부분을 우리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또는 더 나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 이상’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가 우리 인간 실존에 있어서 근본적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왜 이럴까?’라는 물음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모든 인간은 철학의 관점에서든 심리학의 관점에서든 그리고 신학의 관점에서든 근본적으로 지금의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건너가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즉, 아무리 성숙하고 또 자신의 이상에 많이 가까워진 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더 나은 상태로 건너가려는 바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관계는 몇몇 ‘미성숙한’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실존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근본 체험입니다.
이러한 긴장관계에 대해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가 얼마만큼 인지 또 둘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 많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긴장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현실과 이상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자꾸 주위에 힘든 일들이 생겨나고 또 내적으로도 누군가를 향한 분노, 시기심, 미움 등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기도를 규칙적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며칠 못가 또 이런저런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하는 자신의 모습 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누구라도 이런 갈등이 없기를 바랄 것이고 그래서 이런 갈등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자기 나름으로 더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내 모습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죠. 이런 갈등이 계속되다 보면,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을 탓하고 또 그런 자신에게 실망해서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심한 경우에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듯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점점 약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이런 긴장관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갈등을 겪는 것이 물론 좋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을 겪는 이유가 내 자신이 못나고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내 자신을 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맞지만, 그 이유가 내 자신의 근본적인 나 중심성 때문이든 사욕 때문이든 간에 나의 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도 받고 그래서 미움이나 원망이 느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있는 그대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런 상처나 갈등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성숙한 방법으로 다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도, 그런 긴장관계를 없게 해달라는 내용이 아니라 그를 잘 풀어낼 지혜와 도움을 달라는 내용으로 바뀔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요. 그래서 스스로도 몸이 불편한 다른 이유를 찾고 또 다른 이 앞에서 아프지 않은 척 꾸미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이런 모습으로만 지낸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아픈 이유가 뭔지, 정확하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내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그다음에 병원을 가든 약국을 가든,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혹은 덜 아프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관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일이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고만 있다면, 다르게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필요성도 못 느낄 테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관계는 우리 삶에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긴장관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계속해서 몸 차원, 정신/마음 차원의 나 중심성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나 중심성과 연결된 사욕의 뿌리 깊음에 대해서 말씀드린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잘라낼 수 없는 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노력입니다. 애는 애대로 쓰지만 그 주어지는 열매는 거의 없는 헛된 노력이 되는 것이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이상과 다르게 살고 있는 현실의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꾸만 속에서 부대끼는 갈등들이 보기 싫더라도, 그것이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럼 어떻게 ‘현실의 나’에서 ‘이상적인 나’로 더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을지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