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속이는 욕구
‘숨은 욕구’ 찾아야 ‘너 중심’ 파스카 쉬워집니다
욕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안 보여줘
생각과 행동 속 욕구 ‘민낯’ 밝혀내야
지난주에, 신자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내면에서는 어려움을 느끼는 신부님의 모습을 예로 들면서, 우리 안에 있는 욕구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너 중심이 아닌 나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이끌어 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이런 의문을 가지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신부님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그렇게 사목활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신자들에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 본당을 위해서는 좋은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물어봐야 하는 것은, 그 신부님이 자신의 사제로서의 삶 안에서 정말 내적인 기쁨과 자유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그 안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고 낙담한다면, 그 신부님의 사제로서의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또 어떠실까요? 사람의 내면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신부님의 안에서 움직이는 ‘비난/실패를 회피하려는 욕구’ 혹은 ‘애정의존 욕구’를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 중심의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서 하느님께서는 그 신부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실까요? 기껏 사제성소로 불러서 오랫동안 교육시키고 사제품을 주었더니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야단을 치실까요?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도 속상해하시겠죠. 그런데 하느님께서 속상해하시는 이유는, 그 신부님이 못마땅해서 야단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하게 살라고 사제의 길로 부르셨는데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안타까워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제로 열심히 살겠다고 애는 애대로 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의 기쁨보다는 피곤함과 충동적인 화, 또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느님께서도 속상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비단 그 신부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너 중심, 너 중심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처럼 너 중심으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 마음이 어떠실까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면서는 하느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너희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었는데 너희는 왜 여전히 그러고 사느냐 야단을 치실까요?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셨다면 우리를 위해서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저,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엄하신 하느님의 모습처럼 우리를 혼내고 벌하기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우리를 야단치시고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나 중심이 아니라 너 중심으로 살길 바라시는 이유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우리 자신을 희생하기를 원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과 고통과 인내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너 중심으로 살 때 우리가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욕구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렇게 욕구라는 것은 우리를 자꾸만 나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부추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욕구가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욕구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신부님이 신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미사 말고도 레지오 훈화에, 단체 회합에 또 저녁에 예비신자 교리까지 있는 굉장히 바쁜 날입니다. 식사 초대에 응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되는 상황이죠. 그런데 신부님은 초대에 응합니다. 초대해 주시는 분들의 마음이 감사하기도 하거니와, 자기가 바쁘고 힘들다고 해서 사람들의 필요를 거절하는 것은 참된 사제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식사 자리에 참석을 하게 되고, 자신이 와준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힘들어도 오길 잘 했다 생각을 하시죠. 그런데 교리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 위해서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돌아오는데, 하필 차가 많이 막힙니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차는 꼼짝할 생각도 안 하죠.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더 일찍 일어날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화가 나기 시작하죠. 도대체 이 시간에 차는 왜 막히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조금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는지, 하필 이렇게 바쁜 날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화가 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상황을 자초한 게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억울한 마음도 들죠. 자신도 정말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주려는 사제의 마음으로 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이 참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제의 마음으로 다녀온 것이라면, 신부님 안에 화나 억울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나마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들겠죠. 이 신부님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비난/실패를 피하려는 욕구나 애정의존 욕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부님 스스로도 당신 안에서 움직이는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 내가 지금 애정의존 욕구 때문에 이러는 거구나!’ 알면서 택한 행동이 아닌 것이죠. 무리한 상황에서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욕구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려는 참 사제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욕구는 우리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끔 민낯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쉽게 그 욕구를 안 따라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욕구란 것이 우리 안에서 잘 포장된 모습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좋아 보이는 생각들 안에 숨어 있는 욕구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나의 생각과 행동 안에 숨어 있는 욕구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