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자료 13번째 -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술 4

생각해 보니,  기도문 모음에 우리의 감정을 깨우는 기도만이 아니라 

본당에서 정기적으로 배부하는 기도 자료도 올릴까 합니다. 
이전까지의 자료를 한번에 올리는 것보다 ...  
기도 자료들을 단편으로 드리는 것이기에 
연속성이 없습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의 기도 학교에 여러분을 초대하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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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자료 13번째 –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술 4


한밤중 씨름과 하느님 만남 (창세기 32장)               


오늘 저는 여러분과 창세기 32장의 한 본문을 숙고하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 본문을 읽어보세요. 이 본문은 성조 야곱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이야기 하나를 전해줍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을 쉽지 않지만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야뽁 건널목에서 하느님과 씨름한 야곱의 이야기로서 우리는 그중 한 부분을 방금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쌍둥이 형 에사우에게서 불콩죽 한 그릇에 맏아들 권리는 가로채고, 노쇠한 아버지 이사악의 눈멂을 이용해 간교하게 그의 축복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에사우의 분노를 피해 그는 외숙 라반에게 피신하여 결혼을 하고 부를 축적한 후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몇가지 안전 조치를 취했고, 형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남을 위해 준비되었고 야곱 일행이 에사우의 영역이 시작되는 강의 건널목을 건넜을 때, 야곱은 반대편에 혼자 남아있었습니다. 갑자기 한 낯선 이가 야곱을 공격했고 야곱은 그와 밤새 씨름합니다. 창세가 32장에 묘사되는 둘 사이의 씨름이 그에게는 이색적인 신 체험이 됩니다. 


밤은 은밀하게 행동하기에 좋은 때로서, 야곱에게는 혹시나 형 에사우를 기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과 함께 그의 영역에 몰래 들어설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공격으로 당황하게 되었으니,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영리하게 굴었고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가사의한 싸움에 맞서야만 합니다. 성조 야곱은 무방비 상태로, 한밤중에 누군가와 싸웁니다. 이 본문은 공격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통상적으로 ‘한 남성’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한 사람, 어떤 이’를 지칭하여 공격자를 의도적으로 비밀에 부치려 합니다. 사방은 어두웠고 야곱은 적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며, 그는 독자인 우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입니다. 누군가가 성조에게 대항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설화자가 알려주는 유일한 사실입니다. 싸움이 끝나고 이 ‘누군가’가 사라지고 나사여 야곱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이 하느님과 씨름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설화는 어둠 속에서 전개되며, 야곱을 공격한 자의 신원뿐만 아니라 싸움의 전개 과정 또한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해당 단락의 독서에서 둘 중 누가 이겼는지 판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동사들은 자주 특정 대상을 목적어로 지니지 않고, 행위의 경과도 거의 모순적입니다. 둘 중 하나가 이겼다고 여기면, 그 다음 행위를 통해 바로 이것이 철회되고 다른 이가 승자로 묘사됩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더 강한 자로 보이고, 본문에 따르면 상대는 ‘그를 이길 수’없었습니다.(26절) 그럼에도 그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야곱은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시금 상대는 야곱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청합니다. 성조는 이를 거부하고서 조건을 내겁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27절) 형을 상대로 맏아들 권리에 상응하는 축복을 가로챈 그거 이제 한 낯선 자에게 축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을 그를 실제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신성을 점차 인지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붙들려 제압당한 것처럼 보이는 상대는 성조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나 성조가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여기서 싸움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인물을 상대로 힘을 지니는 것을 암시하는데,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이름은 그 개인의 가장 내밀한 현실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그의 비밀과 운명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다른 이의 진실을 알고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낯선 자의 요구에 따라 자기의 이름을 밝혔을 때, 그는 자신을 적의 손에 내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항복이요,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양식입니다.


하지만 이 항복의 몸짓에서 역설적으로 야곱 역시 승자로 부각되는데, 그가 새 이름과 동시에 승리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그에게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라니라 이스라엘(하느님과 겨룬 자)이라 불릴 것이다.”(29절)라고 말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성조의 문제 많은 출신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발뒤꿈치’이고, 독자에게는 야곱의 출생 순간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거 어미의 태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은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습니다.(25,26) 이는 그거 성인이 되어서 형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줍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또한 ‘기만하다, 내쫓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싸움 중에 성조는 상대에게 내어줌과 항복의 몸짓을 통해 기만한자요 억압자인 자신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사기꾼 야곱은 그에게 새로운 신원을 묘사하는 새 이름을 선사받아 이스라엘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해당 보도는 의도적인 애매함을 지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지난 가장 개연성 있는 의미는 ‘하느님은 강하시다. 하느님이 승리하신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이는 야곱의 상대자가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대자에게서 얻은 새로운 신원이 하느님의 승리를 확증하고 증언합니다. 야곱이 상대자의 이름을 묻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축복을 베푸는 명백한 몸짓을 통해 자신을 계시합니다. 성조가 싸움 초반에 청한 바로 그 축복이 이제 그에게 허락됩니다. 이는 책략으로 횡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무상으로 선사된 축복이며, 야곱은 바로 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 성조는 축복을 얻은 싸움의 마지막에서 드디어 다른 이의 신원을 알아챌 수 있었고, 그분은 축복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32,31)라고 말합니다. 그는 새 이름을 지닌 자로서 이제 건널목을 건넙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에게 ‘패하고’ 영원한 표식이 되도록 자신에게 가해진 부상으로 절뚝거립니다.


성경 주해는 이 단락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을 내놓습니다. 학자들은 특별히 여기서 민간 전설에 대한 암시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함의와 본문 구성 단락들을 알아챕니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이 이러한 요소들을 채택하여 설화 안에 삽입했을지라도 그들은 그 의미를 변경했고, 본문은 더 큰 차원을 향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야뽁에서의 싸움은 믿는 이들에게 은유적인 본문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본문으로 자신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지니는 기본 특징들을 묘사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회의 영적 전승은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곧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로 이해해 왔다.”(2573항)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찾는 긴 밤에 대해, 당신 이름을 알고 당신 얼굴 뵙고자 하는 투쟁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인내와 끈기로 하느님에게 축복과 새 이름을 청하는 기도의 밤이고 회개와 용서의 결실인 새로운 현실입니다.


야뽁 건널목에서 보낸 야곱의 밤은 신자들에게 기도 안에서 가장 잘 표현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기도는 신뢰와 친밀함을 요구하며, 하느님과 살을 맞댄 듯한 관계를 지닐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관계는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언제나 신비스럽게 머물고 도달할 수 없게 보이지만 축복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 저자는 갈망하는 바를 얻기 위한 용기와 끈기, 그리고 인내를 요구하는 싸움이라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갈망의 대상이 하느님과의 관계, 그분의 축복과 사랑이라면 싸움의 결말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에 내맡길 때라야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전 생애는 기도와 투쟁의 긴 밤이며 하느님께 축복을 구하는 기도와 그것에 대한 동경 안에 머무는 밤입니다. 그러한 축복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되이 하느님에게서 무상으로 선사 받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주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현실이 변하며 우리는 새 이름과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새 이름을 받아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자신이 하느님과 싸웠고 그분께 기도드렸던 장소에도 새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는 그곳을 ‘프니엘’, 곧 ‘하느님의 얼굴’이라 칭합니다. 이 이름을 통해 그 땅을 축성하고, 그거 하느님과 가진 신비스런 만남에 대한 기억을 그 땅에 각인시킴으로써 그 장소가 주님의 현존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축복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이, 하느님이 자신을 변화시키게 놔두는 이는 누구나 세상에 축복을 가져옵니다. 


주님, 우리가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1티모 6,12; 2티모 4,7) 기도 안에서 당신 축복을 청함으로써, 당신 얼굴일 뵈오리라는 희망 안에서 새로워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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