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자료 14번째 -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술 5

기도 자료 14번째 –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술 5


백성을 위한 모세의 기도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 인물 중 한 인물이 특별히 부각됩니다. 그는 모세라는 인물로서 기도의 사람입니다.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위대한 예언자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전하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보낸 오랜 기간 동안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살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백성을 약속된 땅에서 누리는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재앙을 통해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실 때, 모세는 파라오를 위해 기도합니다.(탈출 8-10장)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누이 미르얌을 위해 주님께 치유를 청합니다.(민수 12,9-13) 그는 정찰대의 보고를 듣고 반항하는 백성을 위해서 간청합니다.(14,1-19) 또 불이 타올라 진영을 삼키려 위협하고(11,1-2), 불 뱀이 많은 이를 물어 죽일 때(21,4-9)기도합니다. 자신의 사명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자 그는 주님께 항변합니다.(11,10-15) 그는 하느님을 뵙고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는 얼굴을 마주하여 대화합니다.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도 모세는 기도했고 전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출기 32장에 나와 있고 신명이 9장에 병행 보도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이야기에 머물고 싶습니다. 특별히 탈출기가 전하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계약의 판을 받기 위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기다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탈출24:18, 신명9,9),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그분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반면, 사십이란 숫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이 경험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유지하게 하는 양식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양식의 포기인 단식에는 종교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단식을 통해 삶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계명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계명은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고 인간의 마음을 양육합니다.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원천이시고 생명 자체인 지고하신 분과의 계약에 들어서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동안, 백성은 산기슭에서 율법을 어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중재자를 기다리다 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여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산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탈출32,1)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에 질린 백성은, 중재자 모세조차 사라진 지금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주님의 현존을 요구하며, 아론이 쇠를 부어 만든 송아지에서 그들 자신에게 적합하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신을 발견합니다.

이는 신앙의 길에 늘 도사리고 있는 유혹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맞갖은, 납득이 가는 신을 만들어 내면서 신적 신비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시나이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러한 요구가 얼마나 어리석고 환상에 적은 허영인지 폭로하는데, 이는 시편 106편에 조롱조로 나와있듯이, “그들의 영원을 풀 먹는 소의 형상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라 명하시고 백성들의 짓거리를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는 터뜨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탈출32,10)


소돔과 고모라와 관련해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도 그의 동의 없이는 행동하지 않으실 것처럼 당신의 의도를 밝히십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리겠다.” 실제로 이 말씀은 모세가 개입해서 이를 만류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바라시는 것은 구원임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두 도시의 경우처럼, 악을 거부하는 하느님의 분노의 표현인 처벌과 파괴는 죄의 심각성을 가치킵니다. 동시에 중재자를 요청하시는 것은 용서하실 의지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합니다. 이것이 자비를 내포하면서도 죄와 악의 실재성을 고발하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이를 물리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용서받고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중재 기도는 죄인의 타락한 현실에 하느님의 자비가 작용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간구자의 청원 안에 이미 표현되며 간구자를 통해 구원이 필요한 곳에 현전해 있습니다. 


모세의 중재는 온전히 주님의 신의와 은총을 향해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함께 시작하신 구세사를 언급하고는 곧이어 주님께서 성조들에게 하신 옛 약속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하며 구원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탈출32,12)라고 묻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작된 구원행위는 완성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죽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이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지 못하는 표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선하신 주님이고 구원자이고 삶의 보증이시며, 자비와 용서를 베풀고 죽음으로 이끄는 죄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그분의 외적 심판에 반하는 내적 생명에 호소합니다. 모세는 그분께서 뽑으신 이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죽게 되면, 사람들은 그분께서 죄를 이기지 못하신다고 여길 것이라는 논리를 펼칩니다. 이는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구원의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해방의 중재자로 파견되었고 이제 기도를 통해 이중의 염려를 표현합니다. 그는 백성의 운명을 염려하는 동시에 주님 이름의 진실성을 위해 주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예에 대해서도 염려합니다. 간구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바랍니다. 이는 백성이 자신에게 맡겨진 무리이며, 또한 이 구원 안에서 하느님의 참된 현실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청원기도 안에서 서로 뒤섞여 분리될 수 없습니다. 간구자 모세는, 기도 안에서 서로 교차되어 오로지 선만을 바라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호소하고 그분께 당신 약속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당신 자신을 걸로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 설립 역사, 곧 성조들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친히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선택하신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단과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그들은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신명10,15)


이제 모세는 주님께서 당신의 선택과 구원역사를 신의 있게 계속 이끌어 당신 백성을 용서하시도록 청합니다. 간구자는 백성의 죄를 변호하려 하거나 백성이나 자신의 업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에 호소합니다. 온전한 사랑이시고, 당신에게서 멀어진 이들을 끊임없이 찾으며, 언제나 선의를 지키고, 죄인으로 하여금 당신께 돌아와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신의를 지킬 수 있게 하시는 자유로운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모세는 죄나 죽음보다 더 강한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도록 하느님께 청하고, 자신의 기도로써 이러한 신적 제시를 끌어냅니다.

생명의 중재자로서 간구자는 백성과 연대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신 것처럼, 오로지 구원만을 걱정한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제시하신 전망을 포기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배제하고 모세에게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친구’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뿐 아니라 그로 인한 모든 결과도 짊어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부순 후 새로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청하기 위해 산으로 되돌아갔을 때 주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는 지워주십시오.”(탈출32,32)


간구자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자신도 바라면서, 주님과 그분의 자비를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산꼭대기에서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서서 백성을 위한 청원기도를 하고 “(기록하신 책에서)저를 지워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제물로 내어놓는 모세에게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를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실제로 하느님 앞에서 친구로서만이 아니라 아드님으로서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저를 지워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당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셨을 뿐 아니라, 꿰뚫린 가슴을 통해 당신을 ‘지우게’하셨습니다. 성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가 죄가 되어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몸에 우리 모두를 짊어지십니다. 그렇게 인간이자 아드님이신 그분의 전 생애는 하느님의 마음을 향한 절규입니다. 이는 용서이지만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용서입니다.


저는 이 현실을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면전에 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그분의 기도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유효하고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며 지금도 여전히 고난 받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 한 몸, 한 정신이 되어 당신의 신원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새로운 계명이나 돌판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당신의 몸과 피를 새 계약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동일화에 들어서도록, 당신과 한 몸, 한 정신이 되려는 소망 안에서 당신과 결합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당신과의 동일화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쇄신하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용서는 쇄신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말씀으로 이 시간을 마치려 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3-35,38,39)

Comments

소피아
항상 감사합니다.

  • 현재 접속자 17 명
  • 오늘 방문자 1,177 명
  • 어제 방문자 1,002 명
  • 최대 방문자 5,554 명
  • 전체 방문자 2,110,693 명
  • 전체 회원수 221 명
  • 전체 게시물 2,296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