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55 삶의 나침반

 



찬미 예수님.

베르나르 신부님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은총으로 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영성신학」, 557)라고 정의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금방 내용이 들어오지는 않죠? 여기에서 ‘실존’과 ‘성소’라는 말은 ‘정체성’과 ‘사명’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사명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얻어진 답들에 동의하면서 그 동의한 대로 살아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여정이 자기 혼자의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여정은 당연히 ‘영적인 동의’의 여정이 되는 것이죠.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것은 한 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너중심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방향성은 이미 찾아져 있지만, 그러한 방향성을 지금 여기, 오늘의 이 특정한 상황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따라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묻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제 이야기를 말씀드렸던 것이죠. 신학교에 발령받아 오면서, 적어도 신학교에 있는 동안 ‘사제 양성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따라서 ‘신학생들을 위해 도움 되는 것을 찾아서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사명에 대해서 일찌감치 깨닫고 동의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실존과 성소에 대해 끊임없이 새롭게, 그리고 제가 처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그 길을 찾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양성자로서의 저의 생활이 추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렀고 그 안에서 자꾸 나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의 결과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는, 즉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결국 베르나르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실존과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고민하는 것과 행복이 어떻게 연결되느냐고요?

그러한 삶의 가장 완전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모범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베르나르 신부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바로 ‘아들로서의 실존과 그분의 사명에 대한 영적인 동의’(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영성신학」, 555)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찾아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다 아셔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남아 가르치면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말씀하셨을까요? 또 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서 30년 동안의 사생활을 사시고, 때가 되면 요르단 강에 가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나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될 텐데 그 첫 번째 유혹은 뭐고 두 번째, 세 번째 유혹은 무엇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아셨을까요? 그 이후의 당신 삶이 어떻게 되고, 제자들은 누구누구를 뽑게 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시게 될지를 예수님께서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가톨릭교회교리서」 464항)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신’(히브 4,15 참조) 예수님의 인성의 측면을 생각할 때,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태어나면서부터 온전히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육체의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의 측면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성장법칙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게 되죠?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홀로 하느님 앞에 머무시면서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대로 따라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여기는 어딘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기도 안에서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씩 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듣게 되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각하게 되는 그런 길을 걸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지상에서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죠? 수난의 길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힘든 때만 참아내면 나중에 부활 할 것이라는 것을 다 아셨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두려움, ‘정말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나?’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길일까? 만일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으셨음에도, 그 모든 것을 다 토로하신 후에 아버지의 뜻에 ‘동의’하신 것입니다. 가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꾹 눌러놓고 마지못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길이 당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에 동의하셨기 때문에 참된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셨던 것이죠.

그렇게 나선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그 처참한 힘겨움에 마냥 괴로우셨을까요? 아니면, 비록 고통스러운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동의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당신 자신의 실존과 성소를 온전히 가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셨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도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저 멀리 하늘만을 바라보고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하는 추상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구체적인 삶과 행동을 방향 짓게 하는 나침반과도 같으며, 그 방향을 따름으로써 우리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구체적인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본래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행복입니다.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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