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어떠세요? 예수님을 따라서 자신의 실존과 사명을 깨닫고 그에 동의하는 길을 잘 시작하셨습니까? 네? 그런데 예수님이 그처럼 당신 삶 안에서 자신의 실존과 사명을 깨달아 가셨다는 이야기가 곧이 들리지 않으신다고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 시작부터 모든 것을 다 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당신이 누구신지 또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셨다는 인성의 측면을 말씀드리면 당혹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인간적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문제는 당연히 신비의 차원으로 남겨 놓더라도, 예수님의 인간적 측면을 너무 간과하는 것은 우리 구원의 여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요즘 사회에서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자식을 뒷받침해주는 부모의 능력에 따라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계층이 세습되는 현상을 빗대어 이르는 표현이죠.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과 사회 현상에 대해 복음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그 표현만을 빌려와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사시고 그 힘겨운 수난의 길도 꿋꿋하게 걸어가신 것은 맞지만 그 이유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 즉 금수저로 태어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처럼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딸로 태어나지 못한 우리들 흙수저는 결코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의 출발점이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도착점도 다를 수밖에 없겠죠. 결국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는 가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그 인성을 함께 강조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흙수저의 처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조건을 지니셨으면서도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또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생 신비의 목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까닭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Sermo 371,1)
이러한 예수님의 인성의 신비에 대해서도 묵상해 보세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씀드렸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일대일의 만남 안에서 그 신비를 묵상하신다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실 겁니다.
다시 기도 이야기로 돌아가, 기도가 자신의 실존과 사명을 깨닫고 그에 영적으로 동의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성모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닌 분이셨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삶이 어떠셨습니까? 우리가 매일같이 외는 성모송의 구절처럼 정말 ‘은총이 가득’한 삶이어서 늘 기뻐하셨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인한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응답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당신이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터이니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다 아셔서 그렇게 대답하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셨지만, 하느님 뜻에 대한 오롯한 믿음과 순명의 마음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벌어지는 성모님의 삶은 참으로 힘겹고 고달픈 삶이었습니다. 미혼모의 처지로 임신한 것부터 시작해서 베들레헴에서의 어려움, 이집트로의 피난, 정결 예식 때 들었던 시므온의 섬뜩한 예언들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열두 살 된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도 그렇고, 나이 서른 넘어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아들을 찾아갔을 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는 대답을 듣는 마음도 편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모님의 고단한 삶의 여정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을까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성모님께서 어떻게 겪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시기 때문에 이 모든 여정을 다 아시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셨을까요? 십자가 죽음의 순간이 괴롭지만 그래도 삼일만 지나면 당신 아드님이 부활할 것을 아셔서 견딜만하다고 여기셨을까요? 아닙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계속해서 전하고 있듯이, 성모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이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루카 2,19.51 참조) 그 이유를,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쩌면 흔들리는 믿음까지도 체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의 종으로서 또 딸로서 묵묵히 그 길을 따라가신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렸던 자신의 응답을 계속해서 되뇌셨을 겁니다. 당신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시면서, 어쩌면 인간적으로 후회하는 마음도 있지 않으셨을까요? ‘내가 왜 그렇게 응답했을까?’ ‘그 때 그 말씀을 거절만 했어도 지금 이렇게 힘겹지는 않을 텐데’ 하면서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이유와 의미를 다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한 믿음과 순명의 마음으로 따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점점 더 깊이 깨달으셨고 기꺼이 그에 동의하는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안에서 성모님의 응답은 완성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 시작에 했던 응답과 온전히 똑같은 말마디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는 응답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참된 이유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면서도 성모님께서 이렇게 살아가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