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요즈음에는 많이 가라앉은 듯 싶기도 합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나뉘어서 매우 격렬한 대립 양상을 보여 왔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인지라 교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굵직굵직한 여러 사회 현안들에 대해서 교회 구성원들도 어느 한 편의 진영에 서서 목소리를 냈고, 그로 인해 교회 곳곳에서 서로 분열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어떠세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느 편에 계십니까?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 아니면 우파입니까 좌파입니까? 우리 교회는 또 어떻죠? 교회는 과연 보수적일까요 진보적일까요?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이런 물음을 드리면 둘 중 어느 하나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교회의 어떤 특정한 모습이나 사건을 떠올리면서, 그래서 교회는 보수적 혹은 진보적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교회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니까 진보적인 걸까요? 아니면 낙태나 피임을 반대하니까 보수적인 걸까요?
교회는 좌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파도 아니죠. 교회가 보수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로지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진보나 보수, 혹은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회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굳이 말씀드리면 ‘복음파’라고 할 수 있을까요?
브라질의 올린다와 레시페 교구의 대주교셨던 헬더 카마라 대주교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게 하자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불렀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따져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세상이 좋아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면 세상은 그러한 교회를 사회주의나 좌파라고 비난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으로 선출되시고 난 후에 보여주신 여러 행보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셨죠.
하지만 교회가 따르고자 하는 것은 철저히 복음, 바로 하느님의 가치입니다. 교회가 진보적이어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가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수년 전에 한 유전공학자가 동물의 생명을 복제하는 연구를 했을 때 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생명복제를 반대한 이유는, 진보·보수와 상관없이 창조주 하느님께만 맡겨진 모든 생명의 신비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낙태나 피임도 마찬가지죠. 현실의 어려움을 모르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같이 아파하더라도, 하느님께만 귀속되어 있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당연히 다른 한 편의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대와 대립의 끝에는 분열이 뒤따르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도 우리 교회는 더 철저하게 복음을 이야기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 사회가 발전시키고 추구하는 여러 관점들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는 복음적 가치에 입각해서 이야기할 때 교회의 목소리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의 가치에 반대되는 세력, 곧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요한 1,1-13 참조)의 세력에 대해서는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살아있는 지체인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어떤 길을 어떻게 가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그 삶이 어떠했는지를 모르면서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그리고 우리 자신이 판단하고 추구하는 것이 정말 복음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따져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복음적인 것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더 복음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는 그만큼 우리는 더 힘있게 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다시 하느님과의 만남, 기도입니다.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만남인 기도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알아듣게 되고, 그 뜻을 이룰 방법과 힘을 얻게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 드린 것처럼, 기도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의 과정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거창한 내용을 말씀드렸지만, 실상 우리가 복음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커다란 일은 아닙니다. 그 옛날 박해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것을 요구받는 우리도 아닙니다. 다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또 지금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자꾸만 나 중심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은 어찌 됐든 상관없이 나의 이익만을 찾고 내 다친 마음만을 달래주려는 모습에서 하느님을 닮은 너 중심의 모습으로 옮아가려는 것, 작지만 구체적인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 안에서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것! 한편으로는 정해져 있는 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계속해서 찾아야 하는 답입니다. 어제의 답이 다르고 오늘의 답이 또 다를 수 있으니까요. 살아있는 그 답을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찾아보세요. 오늘 하루,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만남, 살아있는 기도 안에서 말입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필립 3,8)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