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쓰는 기도 이야기 50 굳은살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결국 우리 신앙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생활을 잘 하고 계시느냐’는 물음을 들을 때면 자신이 아침·저녁 기도를 잘 바치고 있는지, 하루에 묵주기도는 몇 단이나 하고 있는지, 평일 미사 참례는 몇 번을 하는지 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느님을 자주 기억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죠.

초대 교회 교부였던 바실리우스 성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적인 기도로 의무들을 채워서는 안 된다. 영적인 지향과 보다 넓은 애덕을 실천하면서 바치는 기도가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탁자에 앉아 기도하고 감사하라.… 태양과 어둠의 빛에 감사하라. 끊임없이 기도하라. 그러면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할 것이다.”(바실리우스, 「순교자 율리투스에 대한 설교」, 4) 기도 내지는 기도 생활을 여전히 좁은 의미로만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지킬 계명’의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한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곧 우리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도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곧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과 존재가 변화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 즉 염경 기도나 묵상 기도, 성체 조배 등 형식을 갖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도가 결국 우리 삶이라고 한다면, 이런 형식적인 기도는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일까요? ‘아침·저녁 기도나 묵주 기도, 성경 묵상 등은 거의 안 하고 지내지만 그래도 살면서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니까 괜찮다, 나는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는 거다’라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에서 1년 남짓한 시간을 사제로 살긴 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은 다시금 신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때 개인적으로 현지 본당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사제로서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죠. 대신에 매일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긴장하고 또 남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앉아서 강의록을 해석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좁은 의미’의 기도 생활에 소홀해졌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성무일도 기도를 빼먹기 일쑤였고 미사는 방에서 혼자 드리거나 아니면 거르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런 날이 점점 많아지면서는 제 안에서 ‘아, 이러면 안 되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무너져 가는 제 영적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숙사 경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경당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고, 등이 켜진 감실과 그 옆에 예수님의 ‘수난’성상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경당에 들어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감실 앞에 있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다시 돌아오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 이거야!’ 그렇게 무릎을 꿇고 적어도 30분은 주님 앞에 머물다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장궤틀에 꿇은 무릎이 너무 아팠습니다. 다른 천이나 솜이 덧대어져 푹신한 상태의 틀이 아니라 그냥 맨 나무 그대로의 장궤틀이었던 것입니다. 이리저리 무릎을 움직여가며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저는 5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장궤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마음 그대로 방으로 돌아오고야 말았지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시간을 지켜 주님 앞에 있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구나. 하다못해 무릎에 굳은살이라도 박혀 있어야 하는구나.”

물론 굳이 무릎을 꿇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도 성체조배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도라는 것, 곧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신수련 피정을 할 때 예수회 지도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다못해 운동을 배우더라도 처음 한동안은 기초 자세를 연습하고 그다음 단계에 따라서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어찌 된 일인지 기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프로 선수처럼 잘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좁은 의미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를 따라서, 기도가 ‘하느님과의 우정 어린 만남’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 우정은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와의 우정이 쌓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지요.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시작부터 서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또 어린아이의 경우라면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됩니다. 대화를 해나가면서, 만남을 계속해 가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고 그 안에서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우리 매일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일상의 구체적인 순간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의식하고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밀도 있게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집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함께 있는 시간, 좁은 의미의 기도의 시간이 없다면 ‘삶 전체가 기도’라는 말은 알맹이 없는 허울 좋은 껍데기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 결국 ‘기도’하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사 참례나 성경 묵상, 성체 조배 등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같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속마음은, 주어진 계명을 지키려고 의무감으로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 알고 싶어서, 더 사랑하고 싶어서, 더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원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원해서 하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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